-나는 또 안녕하지 못하고

                                                            박일문-


공장에서 돌아와
석간 신문을 보는 저녁.
겨울역 광장의 비둘기도 안녕하고
팝콘을 던지며 까르륵거리는 처녀들도 안녕합니다.
다만 나는 안녕하지 못하고,
저녁마다 단단한 무엇이
울컥거리는 무엇이
나의 속으로 들어찹니다.
우울한 것들, 어두운 빛깔의 것들,
한때는 당신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내 것이 되어버린 것들.

신문을 접고
땀내 나는 작업복을 말리며
창으로 눈을 돌립니다.
영영 내릴 것 같지 않던 눈도 내리고
물살은 거세어져 고물에 찰랑댑니다.
그 물살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뒤늦은 자각,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뒤늦은 후회,
지금 나는, 오래 앓은 기침으로 몸이 피로합니다.

면도를 하고 커피를 만들어 창가에 앉습니다.
멀리 항구가 내다 보이고 그리고 방파제,
그런 것들도 이제는 진눈깨비에 가려
흐려 보입니다.
창을 열면 뜨거운 커피에 진눈깨비들이 달겨들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들 사랑 또한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커피를 마시며 곰곰히 생각합니다.
지금 나에게 남은
당신의 것은 무엇인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투쟁의 나날과 쓰라린 사랑의 추억 뿐.
처음 우리가 이 항구에 왔을 때 댱신이 했던 말,
- 불량한 이 시대는 꽃다운 죽음에도 난공불락이니
도대체 이 시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제는 살아있어야 할 언어들 침묵하고
비어와 훤사들만 진눈깨비마냥 난무하는 듯합니다.
창문을 닫고 커피잔을 치운 후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거울 속을 들여다 봅니다.
지금껏 나는 어떻게 살아 왔던가.
사람을 만나고 악수를 하고 신발을 바꾸고
눈을 감았다 뜨는 일보다 쉽게,
이념을 바꾸고 빛나던 꿈을 버리며
나는 내 피를 스스로 더럽히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나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문명을 찬양하며 날마다 신문을 뒤적거렸으니.

창밖.
정박한 어선의 불빛이
진눈깨비를 뚫고 뼈를 가르며
가슴 속으로 들어 옵니다.
그 불빛에, 그 진눈깨비들의 군무에,
나는 또 안녕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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